<포커스> 박병래展 8.3-21 보안여관 / 한경우展8.11-9.30 대안공간 루프
인터페이스에서 현실과 감각의 영역으로
글 / 정용도
정보는 시간적 긴급성이 사라지면 그 가치가 소멸되지만, 축적을 통해 또 다른 성격의 자료적이고 역사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미디어아트는 정보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앞서 언급한 정적인 텍스트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인간적 삶과 행위를 통해 생산되는 공감각적 양태들이 현실과 상상력의 융합을 통해 지각적 표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인터페이스의 존재, 즉 현실(사물 사실 기술)과 존재(감각을 지닌)를 융화시켜 주는 미디어아트는 삶을 표상적으로 설명해 주는 미학적 행위의 언어가 된다.
박병래의 <째보리스키 포인트(Zeboriskie Point)>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미디어아트의 정보적 특성을 환기시킨다. 비디오를 통해 보여지듯이 무엇인가를 찾는 행위로서의 외적인 탐구와 그에 따른 문화적(과거의 시대적 표상들) 이미지의 오브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작가의 내적인 지리학, 현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기억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미디어의 접점들을 자극함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회상의 작용을 환기시킨다. 한경우의 <레드 캐비넷(Red Cabinet)>에서 비디오는 우리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는 정보들을 해체시키는 것, 그리고 그런 해체의 과정이 우리 현실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기억의 창고로서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이는 작가의 전시장 설치물 속의 오브제들이 ‚시간의 과정’이라는 영역 속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순간 명확해진다. 비디오로 찍힌 실제 오브제들의 분해란 이미지 해체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비디오 이미지의 시간은 현실의 오브제가 가지는 물리적 시간으로 편입되며, 오브제의 시간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의 연장적 경험 혹은 감각과 기억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순환되는 미디어와 현실의 시간
한경우와 박병래의 미디어 작품에서 암시하고 있는 내적인 지리학(박병래)과 시간의 층위적인 회상(한경우)은 이들 미디어를 인터페이스에서 인간적인 삶의 내러티브로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그러한 내러티브적인 특성들은 이들이 내적인 시간과 기억의 지리학을 미디어아트의 가능태로 제시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 두 작가는 현실을 확정적으로 분해하고 해체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미디어를 인성적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무의미한 행위나 이미지들을 삶으로 연결시키며 그 무의미를 보편적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시각적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거나 현상을 그 자체로 수용한다고 해서 이들의 작품이 무의미 그 자체의 상황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의적인 강렬한 상징이나 미학적인 목적을 위한 장치들을 작품을 풀어나가는 언너로 채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경우의 영상 작품 속 여러 장면들, 몬드리안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화면이나 성조기 이미지 등은 20세기 서양미술의 대표적 아이콘들을 환기시킨다. 이런 레퍼런스들은 자기치유적인(몬드리안) 미술이거나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대중적 상징(팝아트)이다. 이런 상징은 그 시대의 작가 스스로가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예술적 지표들을 생산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적인 가치를 참여적인 가치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한경우는 두 종류의 뮤지엄 문화를 대표하는 레퍼런스들을 행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비디오로 전환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레퍼런스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한경우의 비디오는 실시간 움직임이 반영된 비디오의 시각적 이미지와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시간성이 하나의 작품 안에 충첩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변화한다는 하이데거의 도구연관성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동영상 이미지는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이미지는 현실의 오브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시장 풍경은 이미지이고 또한 이미지적인 해체의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실시간의 오브제들로서 남아 있다.
미디어 속 현실의 내러티브
박병래의 비디오 영상들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째보리스키 포인트>라는 영화로부터 개념적인 레퍼런스를 가져온다. 화면에는 사막과 같은 지역에서 우주복을 입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 찾기의 행위는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같은 행위들은 비디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어하고 또한 설명해 주는 주된 개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정황들로부터 귀납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란 삶의 중요한 부분들이고 오히려 삶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요소들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이나.
결국 박병래의 비디오 영상 이미지들은 현실에 부여된 문화적 가치들이 가질 수 있는 한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문화적 가치란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장소 속 삶의 상황들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 관련되는가, 현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미래로서의 현실은 어떠한가와 같은 다소 철학적인 지향성을 보인다. 이런 면에서 종합해 보면 박병래와 한경우, 이 두 작가의 언어는 현실 자체의 내러티브가 된다. 두 작가의 비디오 작품에서 현실의 내러티브는 미디어아트의 차원 혹은 예술의 차원을 넘어 현실의 차원으로 들어와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의미한 듯 보이는 해체의 과정이 현실의 시간과 섞여 참여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고, 그로 인하여 현실의 시간을 암시하고 작가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의 예술적 삶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내러티브는 단지 현실을 설명적으로 펼쳐 놓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참여를 수반하는 확장적인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가의 비디오 작품에서 동영상 이미지들은 시간에 투영된 시각적 현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에게도 대중드라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욕망의 행위들과 그에 따르는 결과들이 거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지속되고, 인간의 다양한 행위가 욕망을 통해 발현됨으로써 삶은 현실로 순환되고 시간의 영역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어떤 해체의 접점을 발견하는가가 예술적으로 중요한 키워드를 성취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아트의 본질적 가치는 무엇인가
미디어아트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와 다름없는, 그러나 실제보다 감각적이고 재념적으로 더 강력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있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 매체적 예술작품들도 관조적이라는 면에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경험의 차원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아트에 있어 좀더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가를 재고해 보아야만 한다. 그 가치는 이 세계와 세계 안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를 통해 가능해지는 개념적 차원들을 인터페이스적인 소통을 통해 감성적으로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에 있다. 의미의 있고 없음이 아니라, 상상력과 현실의 차이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으며, 어떻게 모든 존재로부터 현실과 참여라는 실재를 발결할 수 있는가가 논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한경우와 박병래의 미디어 작품은 미디어적인 시간을 현실의 시간과 중첩시킴으로써 현실의 오브제들을 생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관객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한경우)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의미한 듯이 보이는 탐색 행위로 이루어진 비디오 작품과 이 작품이 설치된 ‚보안여관’이라는 전시 환경이 이미지 안의 장소들과 가지는 관계, 즉 이미지와 현실의 근친성으로 인해 관객이 스스로를 시간 속으로 존재로서 회상하게 만든다.(박병래) 즉 이를 통하여 두 작가는 동영상 이미지가 드러낼 수 있는 또 다른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용도 미술평론가, 독일 쿤스트독 라이프치히 관장. 2010 디지페스타 <백남준 특별전> 큐레이터 역임.
아트인컬쳐 (2011, S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