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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개인전<말더듬>, 2021.12.03~12.28, 아터테인

사회적 경험이 공유되었던 시대의 풍경
글. 임대식

80년대, 극심한 사회 변혁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 대부분의 미디어는 사회 구성원들의 통제를 위한 선전, 선동의 도구로 말 그대로 이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IT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사회구조와 소통의 변화가 거의 어제와 오늘이 다를 정도로 변하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아날로그적 감수성과 함께 무엇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강한 욕망이 공존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 이면에는, 해방이나 민주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시대적 감수성을 대변하고 있었던 강한 의지의 상징들이 깔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바야흐로, 전 세계에 우리의 민낯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 권력은 민중의 의지에 한풀 꺾이는 듯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손에는 미디어 즉, 언론이 있었다. 언론은 정의를 보도한다는 미명하에, 가장 한국인다운 삶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수 없이 많은 미디어적인 창구를 이용해 전달했다. 그 때, 그 군부를 등에 지고 있었던 무서운 권력들은. 그렇게 우리는 그 모든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80년대, 우리 사회가 혹은, 당시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던졌던 그들의 프로파간다 (선전, 선동)을 함께 겪었던 시대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박병래 작가의 회화는, 우선 신문에 실린 말더듬이 교정 광고로부터 시작된다. 광고에 표기된 표현들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듯 하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사라진 (아주 사라지진 않았을 듯 하지만) 말더듬이 교정에 대한 광고가 늘 신문 하단에는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작가는, 미디어적인 기술력을 통해 그 의미들을 만들기 보다는 회화적 요소를 통해 그 의미들을 그리는 것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말더듬은, 경제적 능력으로 인한 교육을 받고 못 받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의 생각들을 즉각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구조라면, 나의 주장이 오히려 사회 전체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 받는다면, 과연 우리는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저 권력들에게 받아들여질까의 두려움으로, 한번은 말을 삼키게 되는 순간, 그때 우리는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녀 사냥하듯, 그때는 미디어 (거의 TV)가 국어 사전을 대신했고, 모든 인문학적인 증거들을 대신했었던 것 같다. TV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그 어떤 검증도 없이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미원'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 MSG의 상징이자 레전드였다. 우리의 건강을 담보로, 미원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보도로, 한 기업이 망할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개인 미디어가 발달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대중의 의식들을 최상위 권력에서 자신들의 가치로 일률화 시키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 가수왕에게 전달되었던 꽃다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조용필, 느슨한 영화의 한 장면들이재생될 수 있는 브라운관의 그 수많은 빛의 망점들처럼 채집한 당시의 미디어의 장면들을 표현하고 있는 작가의 조형적 언어들은, 그만의 회화적 문체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사고가 명확할 수 없었던 그 시대를 관통했을 작가의 회화적 문체. 주장보다는 서로의 눈치를 봤어야 하는 시대의 풍경들. 그 풍경들이 과연 작가에게 초점이 맞고 또렷하게 보여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그의 회화는, 지금도 여전히 공유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경험에 대한 각자의 이해와 해석이 어떻게 서로에게 작동되고 있는가. 에 대해 질문하고 있지만, 대답은 너무나 쉽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