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리스키 포인트, 과거와 현재가 저장되는 째보의 이상적인 공간
유영아(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박병래 작가의 개인전, 《째보리스키 포인트(Zeboriskie Point)》(2011년 8월 3일-21일, 보안여관)는 ‘째보(Zebo)’라는 인물을 통해 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로, 특히 우주인 째보가 남긴 우주복, 헬멧, 산소통, 그리고 타인의 유년 기억 속에서 째보의 자취를 더듬어가고, 그가 남긴 사진과 영상기록의 풍경 속 지역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전시이다. 하지만 작가는 지역의 역사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째보의 무심한 듯하면서도 꼼꼼하게 관찰하는 행동,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동작, 그리고 이야기가 있으면서도 함축적인 영상에 담고 있다. 즉 열심히 자신이 도착한 곳의 정보를 모으지만 그 곳의 역사에는 무심한 듯 보이는 우주인 째보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코믹함 뒤에 그 장소의 역사적 진실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이 전시를 개별작품들을 아우르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파악하지 않고 째보의 파편적인 활동에만 초점을 두면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이 전시공간이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하나의 형식적 틀이자 주제를 강화하는 복선이기 때문이다. 전시 구성에 있어 대사 없이 함축적인 이미지 컷들이 연결되어 완성되는 한 권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처럼, 1층과 2층의 각 방에 전시되어 있는 오브제들, 사진, 영상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전체 전시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때 각 방의 작품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는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전체를 이루는 구성요소(element)가 된다. 그리고 전시장인 보안여관의 각 방은 그래픽 노블의 각 컷에 해당되며, 전시공간인 통의동 보안여관의 골조는 컷들의 프레임에 해당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살펴 보면, 전체 전시는 째보의 유물과 그와 관련된 간접적인 자료들이 주를 이루는 1층의 프롤로그와 실제 그의 본격적인 여정을 기록 영상물로 보여주는 2층의 주요 이야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인 것이다.
1층은 ‘째보리스키 포인트’라는 독특한 타이포그래피와 각 방에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는 소품들, 주인이 없는 방에 가득 피어난 곰팡이와 습한 기운이 가득하다. 이 요소들은 째보라는 인물이 더 이상 이 공간에 남아있지 않음을 이야기해준다. 째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왜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지, 주인은 왜 없는지, 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남겨진 영상과 구술기록, 그리고 우주복과 산소헬멧, 산소통과 같은 그의 유물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록 영상의 우주정거장 입구, 좌표를 의미하는 숫자는 그가 우주와 관련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째보의 이름이 들어간 선창(船艙)에 대한 어떤 남자의 회고를 통해 째보가 선창이 있는 지역과 연관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회고는 그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실제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던 이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째보라는 인물에 실재감을 준다. 그리고 1층에 걸린 ‘일본제18은행(나가사키 18은행(長崎十八銀行))’ 군산지점이라는 실제 공간을 찍은 사진을 보고 그의 활동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을 거라 짐작하게 된다. 이 사진은 째보의 영상 속 공간과도 같은 곳으로 영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예비 정보와도 같다. 좀 더 자세히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텅 빈, 더 이상 사람이 없는 폐허로 변한 실내 풍경은 어렴풋이 이 곳이 과거에는 활발하게 이벤트가 진행되던, 소위 말해 잘 나가던 공간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일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メモリ?ズ Memories)>(1995)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그녀의 추억(彼女の想いで Magnetic Rose)’ 속에서 버려진 우주선 속 화려한 텅 빈 대저택이 폐허로 변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과거의 영광은 온데 간데 없고 사진에 포착된 모습은 벽에 떨어진 합판 조각들이거나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한 풍경이다.
2층은 째보의 군산에서의 여정이 기록된 3개의 영상물과 그의 모습을 찍은 2개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2개의 사진 중 하나는 헬멧을 쓴 째보의 상반신을 찍은 것이고, 그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는 아래 1층에서 본 사진 속 회관의 벽에 걸린 인물사진을 째보가 마주한 모습이다. 그리고 골조를 드러낸 각 방에서 영사되는 3개의 영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째보가 처음에 도착하여 어떻게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주변 지역을 탐험하는지,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들을 어딘가로 보내는 그 활동의 기록을 보여준다. 세 개중 하나가 째보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과정을 담았다면 나머지 두 영상은 째보의 단편적인 활동을 각각 담은 것이다.
첫 번째 영상은 째보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멀리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우주복을 입은 째보의 모습과 그가 베이스캠프(Basecamp)를 구축하고, 데이터베이스(Database)와 안전장치(Safe device)를 만들고 전송기(Transmitter) 장착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가 어떤 임무를 띠고 왔음을 보는 이에게 알려준다. 그가 바람이 심하게 부는 사막과도 같은 황야(荒野)에 구축한 ‘째보리스키 포인트’는 그 만의 공간으로 문명의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순수한 영역이다. 마치 박병래 작가가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1912-2007)의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1970)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할 이상적인 공간으로 삼았던 사막과도 같은 공간이다.1 또한 뫼비우스(Moebius)의 <아르작(Arzach)>(1976)에서 사막을 무대로 아르작의 모험과 판타지가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하다.2 이 곳에서 째보는 누구의 간섭이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신이 모아 온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저장한 정보를 어딘가로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둥그렇게 간격을 두고 박은 나무막대기로 이루어진 베이스캠프와 그 중앙에 만든 데이터베이스, 데이터와 공간을 압축하는 돋보기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나머지 두 영상은 째보가 자신 만의 영역을 구축한 후 시작한 탐사 영상기록들이다. 그 중 하나는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버려진 공간에 대한 것으로 과거 군산에서 화려하고 돈이 많이 회전되던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에 관한 것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일제 시대에 건립되어, 1934년에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 소유로 세워진 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소유 건물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대한통운 군산지점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는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디스코텍으로 사용되는 등 근현대사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을 탐사하기 시작한 째보의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 잔재들과 벽에 걸린 한 장의 광고포스터이다. 째보는 포스터 속 흰 제복을 입은 유명 남자배우를 향해 농약 분무기처럼 보이는 긴 노즐을 들이댄다.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진지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향해 마치 대결을 하는 듯한 그의 액션은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듯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이러한 행동은 진지함과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실소를 자아내는데, 이로 인해 보는 이는 째보라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나가사키 18은행’이란 이름이 주는 역사적인 무게감에 매몰되지 않고 조금 객관적으로 그 공간을 보게 된다. 또 다른 탐사 영상기록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에 원주민들이 가꾸었던 삶의 터전이 군사 기지로 재개발되는 군산 미군기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나가사키 18은행 탐사기록과 마찬가지로 째보는 이 사실과 무관하게 고목의 나무껍질이나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에서 그저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있을 뿐이다. 비행기의 이착륙 소음이 가득한 이 지역이 기지 확장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를 일으킨 중심지라는 것은 째보의 탐사 뒤 멀리 보이는 풍경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째보의 이러한 무심한 행동은 어떤 정치적 사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어떤 액션을 불러일으켜 변혁하겠다는 결연함보다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관심을 가지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작가 박병래를 통해 역사 속에서 부활한 째보와 그의 이상적인 영역인 째보리스키 포인트, 그리고 그의 여정 속에 드러난 지역의 역사성과 개발의 논리가 가지는 부조리는 우주인이라는 SF적인 요소를 통해 우회적으로, 다소 코믹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은 이유는 탐사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이 가지는 진지함 때문이다. 또한 근현대 격동기를 걸쳐 형태를 달리하며 유지되고 있는 보안여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그 장소에서 보여지는 군산의 근현대사적 의미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군산과도 같은 특정 장소가 가지고 있는 특정 공간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맥락을 지역민이 아닌 낯선 방문객(stranger)인 째보의 채집 활동을 추적하여 드러냄으로써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하도록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은 전시를 구성하는 개별 작품들을 바탕으로 하여 전체 전시가 하나의 그래픽 노블처럼 읽혀졌을 때 보다 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1)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쓰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 내 위치한 사막이다.
2) 뫼비우스(Moebius)는 그래픽 노블의 대표적인 작가인 장 지로(Jean Giraud, 1938-)의 필명이다.